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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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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개요

1981년 10월 6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아랍-이스라엘전쟁 8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참석한 사람들이 화려한 에어쇼를 바라보는 순간, 사다트 대통령이 이집트군 회교 극단주의자들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 사건 내용  

* 1981년 10월 7일 동아일보 기사

* 1981년 10월 7일 동아일보 기사

 

 1981년 10월 6일은 수에즈 운하 도하 기념 군사 퍼레이드 중 이집트 군이 수에즈 운하를 건넌 것을 기념하는 승전기념일이었다. 이 여덟 번째 승전기념일에 사다트는 나세르 시티의 무명 용사묘 앞에 특별히 설치된 사열대 위에서 군대행진을 사열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 장비와 부대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그의 옆에는 고위 관리와 외교 사절, 종교지도자, 언론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오후 1시 직전 프랑스 미라즈 기가 상공을 날고 있을 때, 행진 대열에서 움직이던 트럭 한 대가 멈추었다. 멈춘 트럭에서 칼라니쉬코프 소총을 든 한 장교가 밖으로 뛰어내렸다. 사다트의 좌우에 있던 부통령 무바라크와 국방장관 아부 가잘라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서 사다트를 가볍게 제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트는 이를 무시한 채, 그 장교가 경례를 하려는 줄로 생각하고 답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 순간에 그 장교는 사열대를 향해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다른 3명이 트럭에서 뛰어내리더니, 그와 함께 사열대를 향해 뛰어오면서 역시 소총을 발사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열대에 도착한 그들은 수류탄을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했다.


 방송은 끊기고 군대의 사열은 중지되었다. 사다트의 육신은 마디 육군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이미 그는 사망했다. 첫 번째로 총을 발사한 범인은 군대의 사격 교관이었으며, 그가 발사한 첫 번째 탄환이 사다트의 심장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 범인 관련사항

* 안와르 사다트(Anwar El Sadat, 1918년 12월 25일~1981년 10월 6일)/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용의자들* 안와르 사다트(Anwar El Sadat, 1918년 12월 25일~1981년 10월 6일)/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용의자들

 범인들은 이집트 포병 연대소속 장병 6명으로서 서방에 대한 게릴라 투쟁 활동을 하는 '이슬람 지하드'의 회원들이었다. 이슬람주의 조직원들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타협한 사다트를 전체 무슬림과 아랍 민중의 배신자라는 이유로 암살했다고 밝혔다.

 


❏ 기타

  이집트 정부는 그의 죽음과 함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국회는 헌법에 따라서 부통령 무바라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고, 그는 사다트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 국민투표에 의해 대통령으로 인준되었다.
 사다트의 장례식에는 서방의 많은 지도자들이 참석했으나 아랍 국가의 지도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집트 국민들은 반정부 활동혐의로 체포되거나, 반정부 활동에 휩쓸릴 것을 염려해 장례식 기간 동안 집 안에 있었다. 몇 군데에서 소요사태가 있었으나 군에 의해 즉각 진압되었다.

 
 모하메드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 등과 함께 '자유 장교들의 비밀결사단(자유장교단)'를 조직하였다. 1952년의 쿠데타 이후 고위직을 맡았다.
 나세르의 후임으로 1970년부터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후, 사다트는 이집트 정권의 독재적인 성격을 완화하였다. 1973년에는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을 이끌면서 소련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끊고,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1979년에는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한 그의 평화에 대한 공헌으로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총리와 함께 1978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캠프데이비드 협정체결 후, 사다트는 그에게 퍼붓는 외부의 비난에 대해 격렬하게 반론을 펴는 한편, 내부에서의 반발은 강제로 억눌렀다. 그는 집권 초기에 언론의 자유를 허락하고 불법적인 사찰을 금지하는 등 상당히 자유롭고 민주적인 자세를 보였었다. 하지만 사다트는 국내외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대처하면서 점점 독선적이 되어갔다. 게다가 측근의 충고를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국사를 결정하려 했다. 1979년 6월, 2년이나 남은 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실시하여 그의 민족민주당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했고, 1980년에는 조작된 국민 투표에 의해 대통령 선거제도를 바꾸어 영구집권을 시도했다.


 한편 사회에는 기득권층의 부패와 부유층의 사치가 만연하고, 반면 인플레이션으로 중·하층민들의 고통은 가중되어갔다. 정권 초기에 사다트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던 이슬람 세력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는 파업과 시위를 금지시킴으로써 점점 더 독재화되어갔다. 그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친인척에 대한 비난이 날로 심해지자, 그는 특별법을 만들어 그와 그의 주변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1,500명의 저명인사와 반정 인물들이 잡혀 들어갔으며, 그는 1만 5,000명이 더 잡혀들어갈 수 있다고 발표했다.


  정도와 순리에서 벗어난 사다트의 탄압행위는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극단의 반정부주의자들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영향력과 힘을 급격히 키워가기 시작했다. 특히 이스라엘과 단독협상을 한 것은 바로 아랍무슬림들의 형제애를 배신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가장 핵심적이고 강력한 반정부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조직적이고 매우 활발하게 반정부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본래 사다트 집권 초기에 사다트가 친 나세르 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대한 호의적인 정책을 펴면서 무슬림 형제단을 모체로 급성장했는데, 이제 와서 가장 강력한 반정부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반정부 세력을 묵인할 수 없었던 사다트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며, 지도부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을 체포·구금·추방했으며, 끝내는 무슬림 형제단을 해체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점조직화해 지하로 숨어들면서 과격행동주의 무장세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들 무장세력들은 조직적이면서도 집요하게 사다트의 생명을 노리기 시작했다.


 사다트도 그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시로 여행 계획을 바꾸고, 개인 헬리콥터로 움직이며 방탄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사는 인물이었다. 이 확신은 그를 부주의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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